생존의 관성을 깨고, 실존의 소망으로 나아가는 법
인생의 거대한 풍랑 앞에 서면 인간은 누구나 겸허해진다. 암 선고를 받은 병실의 침상에서, 포탄이 쏟아지는 전장의 참호 속에서, 혹은 생사가 갈리는 사고의 찰나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절대자를 찾는다. "한 번만 살려주신다면, 남은 삶은 이전과 다르게 살겠습니다." 그 간절한 기도는 단순한 살려달라는 외침을 넘어, 가치 있는 삶을 살겠다는 엄숙한 서약이기도 하다.
그러나 기적처럼 고비를 넘기고 평온한 일상이 찾아오면, 그 뜨거웠던 서약은 얼음 녹듯 사라진다. 죽음의 공포가 썰물처럼 빠져나간 자리에는 다시 '먹고 사는 문제'라는 생존의 파도가 차오른다. 어제는 생명을 구걸하던 이가 오늘은 사소한 이익에 일희일비하고, 남보다 더 많이 가지지 못해 안달하며 의미 없는 분주함 속으로 자신을 내던진다. 이 비극적인 망각은 우리를 다시 '먹기 위해 사는' 존재로 격하시킨다.
어떻게 하면 이 고질적인 망각의 늪에서 벗어나, 고난 중에 발견한 삶의 목적을 유지할 수 있을까?
첫째, '메멘토 모리(Memento Mori)', 즉 죽음을 늘 곁에 두는 태도가 필요하다.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거울이다. 오늘 내가 당연하게 마시는 물 한 잔, 가족과 나누는 무심한 대화가 사실은 그때 그 간절했던 기도의 응답임을 기억해야 한다. 일상의 사소함 속에 감추어진 기적을 발견할 때, 우리는 비로소 생존의 차원을 넘어설 수 있다.
둘째, '연장전'으로서의 삶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.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삶은 이제 내 것이 아니라 '덤으로 얻은 삶'이다. 성경 시편 50편 15절(개역한글)은 말씀한다. "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." 건짐을 받은 목적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는 데 있지 않고, 그 생명으로 가치 있는 일을 행하며 삶의 주인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다.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, 나에게 남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묻지 않는 삶은 방향 타 없는 배와 같다.
셋째, 고난의 기억을 기록하고 박제해야 한다. 감정은 휘발되지만 기록은 남는다. 위기의 순간에 느꼈던 그 절박한 마음과 깨달음을 비망록에 새겨두어야 한다. 삶의 매너리즘이 찾아올 때마다 자신이 직접 쓴 그 '생의 유언장'을 읽으며 영혼의 잠을 깨워야 한다.
죽음 직전의 당신이 그토록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이유가, 고작 지금처럼 아무런 목적 없이 밥을 먹고 남을 시기하며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였는가? 이 뼈아픈 질문 앞에 당당히 답할 수 있을 때, 우리는 비로소 짐승 같은 '생존'을 넘어 인간다운 '실존'의 길로 접어들 수 있다. 소망이 있는 삶은 죽음을 기억하는 삶이며, 그 기억이 오늘을 가장 빛나게 만든다.